책 소개
앤드루 그로브의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원제: Only The Paranoid Survive)라는 책이다. 경영은 트렌드를 읽는 힘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트렌드와 상관없이 경영의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 이 책은 그 본질을 꿰뚫는 내용으로, 경영 서적의 고전이라 부를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1980년대 후반, 그러니까 지금과는 경영, 마케팅 등 모든 환경이 판이하게 달랐을 시기에 쓰인 책이다.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도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고 TV가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그럼에도 2022년에 처음 접한 나에게 충분한 영감을 준 것만 보더라도 시대를 초월한 고전임이 확실이다. 앤드루 그로브는 메인프레임컴퓨터에서 PC로 주류가 넘어가던 시기, 인텔의 정체성이 메모리 회사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 회사로 거듭난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집필했다. (앤드루 그로브는 당시 인텔 CEO)
모든 기업은 전략적 변곡점을 경험한다. 전략적 변곡점이란 사업에서 근본적인 것들이 변화하는 시점을 말한다. 다양한 이유로 사업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전면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기존과 다른 새로운 전략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업이 쇠퇴하고 기울어지는 재앙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지금 전략적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잘 대응한다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앤드루 그로브는 전략적 변곡점이 발생하는 이유와 알아채는 방법, 극복하는 힘에 대해서 설명한다. 저자가 밝히길 이 책은 규칙의 변화가 일으키는 영향에 대한 책이자, 지도가 없는 땅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책이다.
줄거리
대표적인 전략적 변곡점에 대한 예시로 저자는 컴퓨터 산업의 변화에 대해 묘사한다. (인텔 CEO라는 경험을 살려 책 전반에 컴퓨터 산업의 대변혁에 대한 탐구가 이뤄진다. 쭉쭉 읽기에도 부담 없이 재미있는 내용) 컴퓨터 산업은 과거의 수직적인 구조(한 제조사에서 모든 부품과 소프트웨어 제작, 판매까지 맡아서 한다)에서 수평적인 구조(컴퓨터 제조사, 어플리케이션, 칩 제조사가 각기 다르다)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렇게 큰 변화를 이끈 전략적 변곡점이 어떤 지점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확실한 건 수직적인 구도의 IBM 같은 회사들은 대규모 구조조정을 경험했다. 전략적 변곡점을 지날 때 IBM처럼 과거 방식을 고수하는 기업은 곤경에 처할 수 있다.
반면에 새로운 형태의 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신규 진입자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가 발생한다. 새로운 수평적 컴퓨터 산업 상위 10개 기업 중 과거 수직적 산업 구조에서 성장한 기업이 거의 없다는 것은 기존 세계에서 성공을 구가하던 기업이 완전히 새로운 산업 구조에 적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증명한다. 기능적 전문화가 확산된 덕에 수평적 산업은 수직적 산업에 비해 더욱 비용효과적 경향을 나타낸다.
저자는 전략적 변곡점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으로 '10배의 변화'를 언급한다. (1) 모든 전략적 변곡점은 10배의 변화로 설명되는가? (2) 모든 10배의 변화는 전략적 변곡점을 초래하는가?라는 질문에 저자는 '그렇다'라고 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적 변곡점을 설명하기에 10배의 변화는 매우 중요하다.
- 경쟁자의 10배 변화: 경쟁자와 '메가경쟁' 즉 10배 힘의 차이가 있을 때이다.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가 PC 산업의 10배 힘에 굴복하면서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변모한 것처럼, 대형 서점 체인에 맞서 '책이 있는 카페'로 전환하는 것처럼, 10배의 힘을 가진 경쟁자와의 대결에서는 전문화가 한 방법일 수 있다.
- 기술의 10배 변화: 예전보다 10배 좋아지고, 10배 빨라지고, 10배 저렴해지는 일이 발생한다. 해운업계에 선박 설계표준화, 냉동 운반 선박의 건조 등 생산성에 10배 변화를 가져온 전략적 변곡점 이후 이를 받아들인 항구와 그렇지 못한 (저항한) 항구의 흥망성쇠를 예로 든다.
- 고객의 10배 변화: 특정 기업이 고객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비교적 미묘하게 일어난다. 인구학적 관점으로 이것은 시한폭탄과 같다.(10배의 힘으로 폭발하는 것) 고객의 취향과 태도, 제품의 견해는 10배의 힘을 가져올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젊은이들이 컴퓨터를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전략적 변곡점이 생겼는지 예를 들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스마트폰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 공급자의 10배 변화: 기업은 공급자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언제든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술의 변화, 산업 구조의 변화는 공급자들에게 막강한 힘을 주기도 한다.
- 이 외에도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모든 관련 사업 구조가 변했듯 '보완자의 10배 변화'가 있고, 기술 변화로 촉발된 '규제의 10배 변화'가 있다.
전략적 변곡점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다. 승자가 되냐 패자가 되냐의 차이는 적응력에 있다. 이에 대한 예시로 이번에도 인텔이 등장한다. 인텔은 메모리 시장에서 업계를 선도하던 기업이다. 하지만 막강한 자금, 기술을 보유한 일본 기업의 맹공(수주할 때까지 인텔보다 무조건 10% 저렴하게 제공한다는 전략) 앞에 사업 전략을 수정하고 적응해 나가는 스토리가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발 물러서서 인텔을 바라봄으로써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 지난한 설득 과정 끝에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업으로 거듭났던 과정, 그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반도체 회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들.
전략적 변곡점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온다. 식별하는 3가지 방법으로는 (1) 핵심 경쟁자가 예전과 다르게 더 많아지거나 바뀌고 있는가 (2) 핵심 보완자가 예전보다 덜 중요하게 느껴지는가 (3) 나, 혹은 주변인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것처럼 보이는가. 전략적 변곡점을 통과하기 위해 경영자는 감정의 늪에서 벗어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대처해야 한다. 커리어를 쌓는 동안 효과를 발휘했던 전략들을 고수해서는 안 되고 빠르게 행동해야 한다. 또한 시각화할 수 있는 멘탈 이미지를 명확히 하여 공유해야 한다. 많은 마케팅 도서에서 시각화할 수 있고, 한 줄로 표현해서 구성원이 공유할 수 있는 메시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에 부합하는 내용이다. 무엇보다 리더의 방향이 명확하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총평
압도적인 성공을 경험한 경영인의 저서 다운 굳은 심지가 느껴지는 책이다. 일전에 픽사 창립자인 에드 캣멀의 저서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기업인으로서, 경영자로서, 리더로서 상당히 존경스러운 대목이다. 지금 읽기에는 예시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없어진 기업도 다수) 현실감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경영의 본질이 무엇인가 고민하기엔 충분하다. 게다가 저자가 30년을 앞서 예상한 사례들이 현재 보편화된 경우가 많아서 그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저자가 인텔이라는 거대 기업을 이끈 경험으로 대기업의 예시가 더 많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나처럼 소규모 기업, 팀을 이끄는 사람들에게도 통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특히 '두려움은 무사안일의 반대말이다. 무사안일이 가리키는 칼끝은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정확하게 겨누곤 한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나 역시 내 사업, 내 브랜드가 전략적 변곡점을 지나던 시기(저자의 말대로 정확한 시점을 알지 못하고 그 언저리 어디쯤이라고 짐작)에 무사안일하게 지내는 동안 사업이 기울었던 경험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자기 앞의 생'에서 하밀 할아버지도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라는 말을 했다. 역시 클래식은 통하는 법) 두려움을 피하지 말자. 이 책을 읽고 나는 리더의 역할이 진정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과 약간의 해답을 얻었다고 해야겠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규모와 상관 없이 회사나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씩 읽어볼 내용들로 가득한 보물 같은 책이다.
봄이 오면 눈은 가장자리부터 녹는다. 공기에 노출되는 부분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가장자리로부터 전해 오는 소식을 해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호와 잡음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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